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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1500년의 비밀 ´산삼의 발원지´ 화순 역사적 입?


입력 2009.02.23 10:51 수정         데스크 (desk@dailian.co.kr)

전통심마니협회 "고려인삼 시원지 일부 대학교수들 발표문 사실입증 미흡"

정형범 회장 정형범 회장
고려인삼 시원지(始原地) 복원을 위한 국제 산삼 삼포지엄의 시원지 고찰 및 재배역사에 대한 주제 발표내용이 일부 교수들의 주장과 다르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20일 한국전통심마니협회에 따르면 화순 모후산의 고려인삼 시원지 복원과 관련 일부언론에 소개된 내용과 화순군 보도자료가 내용이 일부 다르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국전통심마니협회 정형범 회장은 "전남 화순 동복삼은 산삼의 발원지이며 고려인삼의 시원지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역사적인 자료를 해석하는 방법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

다음은 역사적 자료에 의한 사실적 입증 방법으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간과 되어왔던 내용들을 면밀히 재분석하고 시대별로 인삼에 관하여 저술 된 내용을 총 망라한 것이다.

1.명나라 陳嘉謨가 1565년에 저술한 本草蒙莖

2.중국 호북성 기주인(蘄州人) 이시진(1518-1593년)의 본초강목(本草綱目)1578년에 완성된 이 책은 부분적으로 같은 분야의 소책자들을 편집한 것.

각각의 본초서는 약 13년의 차이를 두고 저술 되었으나, 인삼에 관한 내용을 기술하는 과정에는 분명 국호가 바뀌어 진 조선시대나 고려시대임에도 조선인삼이나 고려인삼이라 통칭하지 않고 백제삼, 신라삼, 고려삼의 특징을 별도로 기술하였는가? 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분명 각각의 인삼이 가져다주는 특성이 다르고 효과가 다른 이유에서 이를 기술한 것이라 사료된다.

3. 6세기경 양나라 도홍경의 명의별록이나 신농본초경에도 삼국의 인삼에 관해서는 분명한 특성과 효과를 기술하였다.

4. 8세기경 당나라 숙종때의 이순이 저술한 해약본초에도 신라삼의 형태나 보관법을 기술하였다.

이후 8세기와 10세기가 지난 16세기의 명나라 진가모의 본초몽경이나 이시진의 본초강목에도 백제삼, 신라삼, 고려삼의 특징과 효능이 기술 되면서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내용으로 기술이 되어있다.

수령130년 천종산삼 수령130년 천종산삼
유독 백제인삼을 기술하는 과정에서는 한 가지 표현이 추가되어 기술되는 부분에 토산지역 명칭인 동복을 명시하고 인삼의 형태에 상징성 있는 이름 백조삼과 양각삼을 붙인 것이다.

이는 신라삼이나 고려삼에는 없는 특이한 경우의 기술인 것이다.조선시대 임에도 불구하고 고대의 중국에서는 삼국의 인삼 중 동복삼이 그 효능과 쓰임이 남달랐기에, 나라의 국호가 달라지고 10세기가 흐르는 동안에도 백제인삼이 동일하게 통용이 된 것이라 사료된다.

이는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동복삼의 역사성을 분명하게 입증하는 것이라 사료된다.

5. 다음의 내용 또한 백제삼(동복삼)의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가. 모후산의 유래이다.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의 침입으로 동복현의 나복산(蘿蔔山)으로 피신을 하고 공민왕이 나복산을 떠나면서 모후의 품 같이 따뜻한 산이라 하여 이후 모후산이라 불리었다. 여기에서 나복은 두 가지의 유래가 있는데 그 하나는, 조계종 송광사의 창건유래로 보조국사가 나복산(蘿葍山)산에서 나무로 만든 솔개를 날리어 떨어진 곳을 현재의 송광사라 하였다는데서 유래된 나복(蘿葍).

나. 담암 백문보 頒 銀鉤光星日 千載爲盛觀 臣拜頌至寶 子孫傳所.61)위의 시는 고려 공민왕이 사예 김도(金濤)에게 나복산인 김도장원(蘿蔔山人金濤長源)이라는 여덟 자를 큰 글씨로 써서 내려주매 시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蘿蔔은 同福의 別號라는 주가 붙어있다.

백문보(白文寶) 일부내용 발췌 김군이 일찍 학문에 뜻을 두어 나복산에서 글을 읽었다 나복은 맛이 담박하여 뿌리가 참으로 먹을 만 하여라.(金君早志學 讀書蘿蔔山 蘿蔔尙淡薄 菜根誠可灒)

´신농본초경´이나 ´명의별록´에 백제삼의 맛과 향기는 ´담박하다´ 라는 뜻이 있는 만큼, 나복은 인삼을 뜻하는 것으로 사료되며, 훗날 심마니들 사이에서도 무 꿈을 꾸게 되면 인삼을 얻는다는 설이 현재까지도 전해져 내려온다.

다.博學宏詞科榜目恭愍王四年 貞齋先生逸穡卷之二 附錄

이색목은(李穡牧隱),염흥방동정(廉興邦東亭), 정몽주포은(鄭夢周圃隱), 박실정재(朴實貞齋), 김도나복산인(金濤蘿葍山人),이숭인도은(李崇仁陶隱), 안경온(安景溫), 설장수예재(偰長壽藝齋),정도전삼봉(鄭道傳三峯), 윤소종병판(尹紹宗兵判), (하륜영상)河崙領相, 成石磷領相, 변계량승지(卞仲良承旨), 권근양촌(權近陽村), 徐甑掌令, 이행기우자(李行騎牛子), 남재좌상(南在左相), 유관우상(柳寬右相), 염정수흥방제(廉廷秀興邦弟), 김자솔상촌(金子粹桑村),정이오교은(鄭以吾郊隱), 조준영상(趙浚領相)
조선초기 貞齋 朴實(개명 朴宜中)의 逸穡卷之二 附錄

라. 정찬주의 연재소설(“하늘의 도” 중 일부 발췌)

적벽은 신재 최산두 선생이 유배왔던 인근에 있었는데 신재 최산두 선생이 중국의 적벽보다 뛰어나다며 적벽이라 명명했다. 현재는 동복호에 많이 잠겼지만 그 수려한 모습은 여전하다.

“양인의 고통을 해결해 주었다는 사내의 이름은 최산두(崔山斗)였다. 조광조와 한 날 한 시에 서울을 떠나 조광조는 화순 능주로 와 한 달 후 사사 당했고, 그는 同福 나복산(蘿葍山)의 한 민가에서 호를 나복산인(蘿葍山人)이라 짓고 지금까지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화순의 적벽

마. 모후산의 원래 이름은 나복산(蘿蔔山)이다.

나복은 무나 메꽃을 일컫는 식물로 오래 전부터 산 중턱에서 재배한 동복삼(同福蔘)이었다. 개성 상인들이 동복삼을 가져다 재배해 고려인삼이 태동했다고 전하는 것을 보면 모후산은 고려인삼의 최초 재배지인 셈이다. (모일간 신문의 발췌)

6. 역사적 사료는 어느 한 개인이 속해 있는 지역에 따라 평가나 해석을 달리 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모 대학의 교수가 과거에 발표한 일부의 내용이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고려인삼, 즉 고구려삼 , 백제삼, 신라삼은 그 특징과 질이 1500년 전 중국 양(梁 )나라 때 도홍경이 쓴 의서인 신농본초경집주 (神農本草俓集註)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는 오늘날 고려인삼을 고구려삼으로 개성의 직삼, 신라삼은 풍기의 반곡삼, 그리고 백제삼은 금산의 곡삼인 세 가지 형태의 백삼으로 연관하여 추측 할 수 있다.”

고려인삼은 동복의 동복삼이 당시 고려의 수도인 개성으로 유입되고 서방에 알려지면서부터 붙여진 이름으로, 엄격히 동복삼의 실체를 말하는 것이며, 고려인삼의 시원지가 동복삼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밝혀내고자 화순군과 산삼학회의 주관으로 심포지엄을 개최하는 것으로 발표가 되었다.

6세기가 아닌 15세기경 에도 풍기나 금산의 인삼은 토산품으로서의 역할이 아닌 조세의 할당제인 공납수준으로도 지역명이 분명히 명기되지 않았음이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나 있다.

더욱이 금산인삼을 백제삼으로 연관지어 추측을 한다면 이는 1565년 진가모의 본초몽경이나 1578년 이시진의 본초강목에 나타난 동복삼의 실증적 자료를 금산인삼으로 오해할 소지가 분명히 있다고 사료된다.

당시의 인삼은 산삼을 지칭하는 것으로 현재의 인삼과 형태를 비교하여 추측을 한다면, 동복삼 본래의 형태적 평가와는 일치되지 않는 것이라 사료된다. 현재의 인삼은 수세기 동안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여 과거의 특성이나 형태를 벗은 지 오래이다.

그러나 현재의 산삼은 고서에 나타나 있듯이 15세기가 흐른 시점에도 전혀 다를 바 없는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고구려산삼은 크고 물렁하다´, ´신라산삼은 사람의 형태를 취하고 수족이 있다´. ´백제삼은 작고 견고하다´.

수령130년 천종산삼 수령130년 천종산삼
현재 이와 같은 형태의 산삼이 작년 한 해 동안에도 무수히 발견이 되었다. 산삼을 알아야 인삼을 논 할 수 있다. 현재의 인삼은 고대의 인삼과는 엄격한 형태적 특징이 다르다.

7. 나복을 모후산으로 개명한 것은 고려 공민왕에 의해서이다.

이 또한 역사적 실증 자료에 의한 가치 있는 명칭이다. 어느 한 개인의 주장에 의해서 명칭이 함부로 논의 될 수 없는 것이라 사료된다.

첫째, 화순군 군민들의 동의가 우선시 되어야 하며, 둘째는 개칭이 얼마만큼의 기대효과를 불러 올 수 있느냐는 것이다. 개칭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고려인삼의 시원지 복원이 먼저 요구되는 것이다.

이의 선행과제는 우수한 백제삼 씨종의 확보가 시급히 요구되는 것으로 현재의 경상도 강원도 씨종을 가지고 동복삼의 복원이 될 수는 없다고 사료된다. 질적 개선이 없는 동복삼의 복원은 효용가치가 없는 것이라 사료된다.

동복삼의 실체를 10년을 추적해 온 본인도, 수박 겉 만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다. 단 몇 개월 만에, 그것도 동복삼의 실물이나, 그에 대한 과학적인 데이터하나 없이 동복삼의 복원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 한다면, 너무 조급해 하는 것이 아닌지 심히 우려 될 뿐이다.

글/정형범 한국전통심마니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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