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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 비밀 화순모후산 ´산삼´ 역사성 입증


입력 2009.02.15 21:31 수정         데스크 (desk@dailian.co.kr)

[기고]임원십육지(林圓十六志)113개 군·현 전라도 장수현과 동복현 두 지역 토공(土貢)표기

그동안 전설이나 구전으로만 여겨지던 전남 화순군 모후산 동복삼이 실제 존재했음이 역사적 사실로 밝혔다.

화순 동복삼의 실체를 찾아 활동해 오면서 ´한국전통심마니협회´를 이끌어온 필자가 10년만에 과학적인 성분분석과 함께 동복삼의 역사적 사료를 추적한 실체를 내용을 널리 알려 우리삼의 우수성을 보존하는데 그뜻으로 역사적 내용을 서술해 본다.

전남대 박돈희 교수와 필자인 정형범 한국전통심마니협회장 전남대 박돈희 교수와 필자인 정형범 한국전통심마니협회장
백제의 인삼은 5세기경 백제 온조시대와 고구려 20대 장수왕 23년인 435년에 위(魏)국의 조공품과 수교품으로 인삼을 취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6세기 초 중국 양(梁)나라 도홍경(陶弘景 452년-536년 85세)은 그가 저술한 명의별록(名醫別錄)에 백제 25대 무령왕(武寧王)12년인 513년에 양(梁)나라의 무제(武帝)에게 인삼을 예물로 보내었음을 기록이 되어있다.

후일 저술한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도 백제인삼이 특히 뛰어나다 하였고 중국의 상당삼(上黨蔘)이 좋았으나 이미 멸종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후대에 와서 밝혀진 바로는 중국의 상당삼은 가시오가피과의 인삼이 아닌 초롱꽃과의 만삼으로 인삼과는 전혀 다른 종으로 밝혀졌다.

삼국의 인삼 중 하급품은 고구려에서 생산되며 다음으로 해동신라삼(海東新羅蔘)이 좋다고 기록했다. 명의별록(名醫別錄)에도 백제삼이 제일 좋고 다음이 고려삼이라고 했다.

백제인삼의 형태나 기미, 인삼 노래(시)등을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백제 멸망후인 8세기경 당나라 숙종때의 이순(李珣)이 저술한 해약본초(海藥本草)에도 신라국에서 공물로 바치는 인삼은 사람과 비슷하며 수족이 있다. 길이는 약 30㎝ 정도이며 압착하며 삼(杉) 나무상자에 넣어 붉은 비단으로 싸서 보관했다.

화순모후산 백제삼 화순모후산 백제삼
우수한 인삼은 한 개의 줄기에 세 개의 가지를 지니고 있다고 명기되어 있다. 덧붙여 9세기경 신라 최치원(서기 857년 출생)이 중국의 당나라에 유학하여 고변의 종사관이 되어 자신의 생일에 인삼을 상관에게 바치며, 생김새는 삼아오엽 ´세 개의 가지에 다섯 개의 잎´은 분명히 갖추고 있으나 질이 뛰어나지 않음을 송구해 하며 남긴 글이 최치원의 ´계원필경 헌생일물장´(獻生日物狀)에 남아있다.

이를 보면 인삼은 분명히 ´세 개의 가지에 다섯 개의 잎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도홍경의 신농본초경에도 허준의 동의보감에도 인삼은 한 개의 줄기에 가지가 셋, 잎은 다섯 개로 이루어 졌다고 기록되어 있는 만큼 인삼(산삼)은 분명 한 개의 줄기에 가지 수가 세 개였던 것이다.(山參의 參자가 석삼참고)

백제멸망 후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도 백제지역 동복삼의 우수성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는 조선 초기에 동국여지승람이나 1454년 단종2년에 정인지등이 완성한 세종실록지리지에 인삼을 공납하는 공삼군현(貢蔘郡縣)이 113개 군현에 달했고 조선 말엽에는 53개 군현으로 감소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임원십육지(林圓十六志)는 제주도를 제외하고 전 국토에 인삼이 분포한다고 했다. 113개 군현 중 유독 전라도의 장수현과 동복현 두 지역은 지역토산물을 지칭하는 토공(土貢)으로 표기가 되어있고, 나머지 지역은 인삼공납 지역으로 기록이 되어있다.

이는 조선 초기 이전에 동복삼이나 장수현의 인삼은 토산품으로서의 위치를 확실히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고려인삼의 시원지로서 동복현을 인정하기엔 미흡한 점이 없지 않다. 다음의 내용에서 동복삼의 우수성이 6세기경 도홍경이 저술한 내용과 일치하는 것을 찾을 수 있다.

신라가야삼 신라가야삼
중국 명나라 가정(嘉靖)44년인 1565년에 명나라 사람인 진가모의 본초몽경(本草蒙經)에는 백제삼은 일명 백조삼(白條蔘) 속명 양각삼(羊角蔘)이라 하고 고려삼은 백제삼보다 못하고 신라삼은 인형을 닮은 것이 신통력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백조삼이나 양각삼은 화순군 동복면의 ´동복삼´을 지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8세기경 당나라 숙종때의 이순이 편찬한 해약본초의 내용과 8세기가 지난 16세기때 명나라 진가모가 저술한 본초몽경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800년이 지난 신라삼에 대한 표현이 일치 하듯이 동복현의 백조삼에 대한 내용 또한 신농본초경 집주에도 표현되어 있는 바, 10세기가 흐른 후에도 진가모가 저술한 본초몽경의 양각삼, 백조삼은 일치하는 내용인 것이다.

산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고구려지역인 장백산 강원도삼과 신라삼의표현은 현대에 와서도 분명히 들어맞는 형태의 사실적 기록이지만 ´백제인삼은 희고 견고하다´의 표현에서 ´백제인삼은 분명히 노랗고 견고한데´ 도저히 우수한 양질의 최고의 산삼을 왜? 희다라고 하였는가? 라는 의문점이었다. 하지만 해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백제에서 중국으로의 긴 여정을 생각하고 인삼의 부패를 막기 위하여 대나무를 이용하여 인삼의 겉껍질을 벗겨 내고 말려서 가지고 갔다는 데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백조삼).

상기 내용을 회자하여 다음 내용을 연결하면 동복삼의 실체를 찾는 데는 그다지 문제가 따르지 않는다. 하지만, 18세기인 1770년 영조 46년에 홍봉한이 편찬한 ´증보문헌´비고와 19세기인 1824년 순조24년에 김이재가 편찬한 개성읍지인 ´중경지´의 내용만 가지고서는 고려인삼의 시원지가 동복현이라는 내용을 인정하기엔 부족함이 있었고 더욱이 천수백년 전부터 동복삼이 유래되었다는 내용은 전설로 치부되기 쉽고 역사적 고증을 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고구려 강원도삼 고구려 강원도삼
하지만 백제 25대 무령왕 12년인 513년부터 개성읍지인 중경지의 편찬시기는 1311년의 차이가 난다. 여기에서 천수백년 전의 기록은 전설이 아닌 사실적 기술로 이해 할 수 있다.

백제 25대 무령왕 12년인 서기 513년에 양나라의 무제에게 보낸 진 인삼은 백제의 동복삼이었던 것이다. 백제온조시대인 435년에 이미 인삼의 교역내용이 수록되어 있고, 513년에 황제인 양무제에게 동복삼을 보내었다면 건조한 상태에서 몇 백근에 이르는 것일텐데, 요즘처럼 몇 뿌리만의 채취로는 가당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상당량의 재배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대목이다.

6세기초 도홍경의 ´명의별록´과 ´신농본초경´ 집주의 내용과 당나라 숙종때 이순이 편찬한 ´해약본초´의 내용과 8세기가 지난 16세기때 명나라 진가모가 저술한 ´본초몽경´의 내용을 연결하여야만 가능한 것이다.

당시는 궁중의 의서를 편찬하는 도홍경이 62세때 한창 활동을 왕성하게 하던 시기로 양무제에게 보내 진, 백제인삼과도 시기가 일치한다. 15세기경 조선초기의 ´세종실록지리지´ 16세기경 명나라 진가모의 본초몽경, 18세기경 증보문헌비고, 19세기경 개성읍지 중경지등을 연결하여 시대상을 분석해 보면 ´고려인삼의 시원지가 화순군 동복면이라는 사실´은 전설이 아닌 ´역사적 사실´임이 밝혀지는 것이다.

백제 25대 무령왕 12년인 서기 513년에 양나라의 무제에게 보낸 진 인삼은 백제의 동복삼이었던 것이다.

2005년 11월에 발견 된 화순군 모후산 천종산삼은 양나라의 도홍경이나 명나라 진가모가 기술한 형태나 특징이 일치한다. 해당 산삼은 CLUDE방식에 의한 사포닌 토탈 함량과 사포닌의 종류에서도 전국평균인 60mg/g당 보다도 1,7배에 달하는 103mg/g당 수치를 나타내었다.

현대는 과학의 입증방법이 최선인 것을 감안한다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총체적 입증사실이다. 산삼의 우수성을 두고 지역적 연고를 앞세워 동복삼의 우수성에 의문을 제기했던 인삼업계와 산삼업계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구전이나 전설 고서의 내용이 결코 허무맹랑한 내용이 아니었음을 밝혀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현재의 화순군 동복면이 어떠한 이유에서 인삼재배를 중단하게 되었는지 상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동복현의 인삼이 우수한 만큼 조정의 지나친 토공요구로 삼폐지역의 하나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전남 화순군은 고려인삼 시원지로서의 복원이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특이할만한 내용 중의 하나는 강화군이나 개성군 금산군 풍기군이 하나같이 인삼의 오랜 역사성을 강조하며, 지역군의 인삼을 홍보하여 옛 지명을 면밀하게 찾아보았지만 조선초기인 1454년도에 정인지등이 완성 한 ´세종실록지리지´ 그 어디에도 인삼공납의 흔적이 없다라는 사실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결국 해당인삼이 당시에는 양적으로나 질적면에서 공납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음을 시사하는 내용으로 유추해 볼 수 있겠다.[정형범 한국전통심마니협회 회장)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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