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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1500년의 비밀 화순 동복삼 고려·조선의 조공품⑤


입력 2009.02.24 11:10 수정         데스크 (desk@dailian.co.kr)

고려인삼 조공 상업으로 서방에 알려지면서 국가명 앞에 인삼을 붙인 것

정형범 회장 정형범 회장
고려인삼 시원지(始原地)는 화순이 정확하다.그러나 복원을 위한 국제 산삼 삼포지엄의 시원지 고찰 및 재배역사에 대한 발표내용에는 문제투성이로 특히 교수들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

우리의 역사는 자주성 보다는 열강들의 침탈 앞에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이러한 점을 악용한 열강들의 조공 요구는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그 중 하나가 고려인삼이다. 여기에 따른 고려 조정이나 조선조정의 각 지방 인삼공납 요구는 거의 학정의 수준에 이르렀다. 이를 지키려면 이전에 은밀히 진행 되어오던 인삼재배가 활성화 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래전에 인삼재배가 성행 되었으면서도 1454년 단종2년에 정인지등에 의해서 완성 된 ´세종실록지리지´에 인삼공납지역의 표기를 제외하고는 인삼재배를 명문화하여 국가사료나 역사서에 남기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여기에 있다.

수령130년의 천종산삼 수령130년의 천종산삼
조정의 지나친 인삼 공납요구에 지방의 관료나 당시의 심마니가 방법을 강구해 낸 것이 오늘날의 인삼재배이며, 조정의 눈을 속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정 또한 이를 모를 리 없겠지만 공식화하여 머리를 조아리는 조공을 바치면서 이 인삼은 자연에서 채취된 인삼이 아니고 인간이 재배한 인삼입니다.라고 할 수는 없는 형국이니, 이를 사료나 역사서에 명문화 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가 고려의 수도인 개경이나 조선의 수도인 한양은 인삼공납지역으로 세종실록지리지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는 사신들이 수도인 개경이나 한양에 인삼재배의 실상을 먼저 알게 될 것이라는 전제하에 이를 엄격히 통제 하였을 것이고, 공납을 하는 입장에서는 굳이 재배된 인삼임을 밝히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개경이나 한양 당시의 산세로는 충분한 인삼재배가 가능한 지형의 특성을 갖고 있다. 이 처럼 훨씬 이전에 인삼재배의 과정을 추정 할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고려시대에 중국은 삼국시대의 인삼을 각각 삼국의 명칭을 부여하여 본초서를 완성한데 반하여 고려조정내에서는 이를 세분화 하지 않고 통칭하여 ´고려인삼´이라는 명칭으로 교역이나 조공 상업으로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 서방에 알려지면서 코리아(KOREA) 또는 코레(COREA)라는 국가명 앞에 인삼을 붙인 것이라 하겠다.

이 처럼 고려인삼의 모태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함에도 이를 전제한 연구를 모색하지 않고 단지 조선후기와 일제강점기의 내용만으로 ´고려인삼시원지´인 동복의 역사성을 선포한다면 이는 연구하는 학자의 자세이기 보다는 일반인들이 인식하고 있는 내용 보다 진일보하지 못한 축소의 의미가 짙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아래는 1711년 300년 전의 내용이다. 모교수의 발표내용에 대한 분명한 반론 근거이다.

네덜란드인이 보고 그려낸  인삼 네덜란드인이 보고 그려낸 인삼
우리는 인삼이 삼아오엽 또는 삼거오엽으로 한 개의 싹대에 가지가 세 개인 오엽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국의 본초서나 허준의 동의보감에 이르기 까지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위의 사진은 분명 가지가 네 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인삼재배로 개량되어 현재의 인삼이 가지 수가 네 개이거나 다섯 개 이듯 재배 된 인삼임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또한 뇌두 부분이 요즘의 인삼처럼 두껍고 당시로서는 너무나 어린 인삼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뿌리 또한 짧은 것이 산삼의 형태보다는 인삼에 가깝게 표현되어 있다. 12년-13년의 수령을 나타내고 있으며, 마치 식물도감에 실린 그림처럼 세밀한 이 삽화는 프랑스 선교사 자르뚜가 1711년 4월 12일 북경에서 보낸 서신과 함께 직접 그려 보낸 인삼의 모습이다.

1709년 청나라 강희제는 예수회 프랑스 신부들에게 지도 제작에 사용할 지형 자료 수집을 위해 조선을 관찰하도록 했다. 자르뚜 일행은 그 해 압록강과 두만강 하구까지 도달하여 그 위치를 측량 했으나 조선 국경을 넘지는 못했다.

자르뚜 신부는 이 때 조선 국경 부근의 한 마을에서 채집한 인삼을 세밀히 관찰한 다음 부위별로 자세히 그려 인삼의 약효와 식별법 등에 관한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특히 조선 국경 지역과 조선에서 캐낸 인삼의 효능이 가장 탁월하다고 강조한 이 보고서에서 그는, 서양에서는 깊은 산과 숲이 우거진 캐나다 지역에서 유사한 종류의 인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과연 놀랍게도 몇 년 후 그의 예상은 적중하여 그의 기록과 삽화를 토대로 캐나다의 라피도 신부가 마침내 몬트리올의 산속에서 인삼을 찾아냄으로써 미국산 인삼의 효시가 되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글/정형범 한국전통심마니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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